"물방울은 무색무취다. 본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내 욕심은 그 물방울로 그림을 만드는 일이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았다. 어떤 때는 (물방울을 그리면서) 영혼과도 닿을 수 있겠구나, 아무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저렇게 그리다보니 도에 이르는 것 아닌가하는 착각도 둘었다."
"물방울은 친구들의 살점이고, 피다. 그러나 그게 늘 피로 응고할 수도 없는 거고, 그것이 물방울이 됐고, 눈물이 됐다.
김창열 화백 그림 최고 가격 낙찰가
8,200만원, 케이옥션 경매
10억 4천만원, 서울옥션 강남센터
김창열 화백의 작업 모습
김창열(金昌烈, Tschang-Yeul Kim, 1929년 12월 24일 ~ 2021년 1월 5일)
대한민국의 미술가.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물방울 화가'로 알려져 있다.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파리 첫 개인전 이후이지만 물방울의 전조를 알리는 작품들이 제작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제'(1969) 등에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 주위로 겹겹이 곡선들이 둘어있다. 이들 작품은 물방울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을 포착한 듯하다.
그는 평양의 대동강 상류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생가 뒤쪽 산기슭 세 곳의 바위 구멍에서 샘물이 콸콸 용솟음치며 솟아올랐고 그 샘물은 일직선의 수로를 이루며 강물로 흘러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창열 화백은 유년시절 그 샘물 주위와 강가에서 물놀이하며 자랐는데 어린 시절의 이런 기억은 힘든 상황을 명민한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송암리에서 김대권과 안영금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며 붓글씨를 통해 회화를 접했고, 광성보고 시절에는 외삼촌으로부터 데셍을 배웠다.
김창열은 월남 후 서울의 다양한 회화연구소를 다녔다. 처음에는 조각가 이국전 연구소에 다니다가 연구소가 폐쇄되자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 때 발발한 6·25 전쟁으로 1950년 학업이 중단되었고,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가족들과 헤어진 채 김창열은 길거리에서 의용군 모병 반에 끌려갔다. 다행히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김창열은 눈치껏 도중에 도주를 했고 서울수복 때까지 모두가 피난 가서 비어 있던 자기 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누군가 김창열이 의용군에 있었음을 고자질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현병대에 끌려갔으나, 김창열 집에 뭐라도 집어갈 게 없나 살피러 들어온 아주머니에게 그의 일기가 발견되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일기장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구제를 해주어 큰 탈 없이 석방되고 다시 피난 중이던 가족을 만난다.
1957년 5월 김창열은 평소 친분이 있던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김청관, 라병재, 조동훈, 이철, 김종휘,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과 함께 뒤에 <한국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고,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국 공보원에서 첫 동인전을 개최했다. 뒤에 박서보를 찾아가 협회에 가입시켰고, 그의 제안을 받아 동인전의 이름을 "현대전"이라고 약칭하고 제2회부터 함께 해나갔다.
1958년 개최된 현대전 3회와 4회는 세간의 주목을 유독 많이 받았다. 4회전 이후 현대전은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었던 앵포르멜 운동의 한국판이 되었고, 그런 일색이 싫다고 나가는 동료들이 계속 생겨 현대미협 회원들은 매번 교체되었다. 김창열은 서울 경찰전문학교 도서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집과 미술서적을 통해 당시 세계적 흐름을 읽어냈고, 창작에 전념했다. 하지만 박서보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후배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경찰직을 그만 두었고 성루예고 교사로 근무하며 창작을 계속했으나,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자 괴로움 끝에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61년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가 있던 박서보가 주선하여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이 초청되었고, 김창열이 출품작가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다음 1963년에는 제3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작가를 선정하는 커미셔너가 되었고,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1961년 파리 비엔날레 이후 해외 전시나 국제 비엔날레에 출품할 기회들이 계속 주어지자 사람들 간에 경쟁이 극심해졌고 마침내는 국제적 출품 작가를 선정하는 문제를 두고 108인의 연대 서명과 같은 일까지 벌어졌다.
김창열은 미국에 가 있던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거기서 다시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6년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미국에서 한달 동안 연수를 받게 된다. 이후 미국에 남아 김환기와 마찬가지로 넥타이 공장에서 일도 하고 갖은 잡일을 하며 4년을 버티면서 그림을 그린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를 통해 세계미술계에 대한 도전의식을 키우던 중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박서보의 추천으로 1971년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도 이 때 만나게 된다.
김창열은 파리 근교 빨레소(Palaiseau)라는 곳에서 마굿간을 아뜰리에로 쓰던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 작업실을 이어 받아 지금의 아내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 동거하며 그곳에서 주야장천 그림만 그렸다.
마침내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창안하기에 이르렀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들에서도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1972)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물방울을 소재로 전 세계에서 활발한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2004년 프랑스 국립 쥐드폼미술관 초대전에서는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전시를 하였다.
2016년 9월 김창열이 한 때 경찰 생활을 했던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었다. 현재 김창열은 한국으로 돌아와 성북동 자택에서 살다가 2021년 1월 5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작품세계
그의 작품세계는 '물방울'이라는 소재로 일관된 측면이 있으나, 시대별로 변화한 점들을 고려하여 10년 단위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 화백의 작품은 1960년대 앵포르멜(Art Informel) 시기, 1970년대 물방울 시대, 1980~90년대 '회귀'연작 시리즈로 구분된다.
그가 물방울을 오브제로 발견한 것은 1970년대 파리 근교의 한 마굿간에서 살면서다. 어느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받았는데, 옆에 뒤집어 둔 캔버스에 물방울이 튀었고, 햇살이 비추면서 크고작은 물방울이 알알이 생동감 있게 펼쳐지며 찬란한 그림이 됐다. 그리고 김창열과 물방울의 극사실주의 회화가 탄생하게 된다.
1960년대
1965년~1971년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 '서정적 추상'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받아 반복되는 형태들의 배열로 구성되어 기계적이며 추상적이다. 대표작으로는 《Rite》 시리즈가 있다.
1970년대
작가가 파리로 이주한 이후의 시기로, 물방울의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2년 살롱 드 메에 입선한 이후로 여러 그림들에서 단일한 모티프인 물방울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하나의 혹은 다수의 물방울이 캔버스의 다양한 위치에서 나타난다. 대표작으로는 《Event of Night》(1972), 《Water Drops》(1974)등이 있다.
1980년대
작가는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는 거친 표면이라는 물체의 즉물성(卽物性)을 살리는 반면, 이러한 표면에 맺힐 수 없는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바탕과 이질감을 형성하여 실제 물방울이 가진 물질성을 상실하게 한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단순한 마대에서 나아가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음으로써 동양의 철학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마대에 물방울들이 몰려있는 《Water Drops》(1987), 천자문 위에 물방울들이 그려진 《Recurrence》(1989)등이 있다.
1990년대
이 시기에 작가는 《Recurrence》(회귀)라는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물방울들은 단지 맺혀있는 것에서 변화되어 일그러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며, 지워지기도 한다. 또한 물방울의 바탕에는 끊임없이 천자문이 작게 혹은 크게 등장하는데, 이는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형성된 작가의 향수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아래에서 쓰던 천자문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작가는 이전 시기까지 계속되었던 채도가 낮은 배경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과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시도한다. 《Bell》(2003)에서는 하늘색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고, 《Yellow Earth》(2003)에서는 이전과 달리 채도높고 적극적인 노란색 바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Meditation》(2004)의 경우에는 물방울 모양의 큰 유리병에 물을 담아 천장에 쇠줄로 매달아 늘어뜨린 설치미술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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